2010년 11월 25일 목요일

기도에 대하여 14강 - 신령한 생활을 위한 기도

고고한 생활만 한다고 신령한 생활이 아님. 현실 세계에 진출하여 수고하고 투쟁하며 교회를 지지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하는 것임. (신령한 싸움)

신령한 자는 성숙한 사람의 생활을 구하는 것이고 -> 필연적으로 전투하게 됨 -> 적인 마귀의 세력을 알고 싸우러 나가야 할 방향, 그들의 특징을 알아야 함.

싸워야 할 대상은 마귀와 마귀의 부하들로 구성된 세력이 세상의 흑암의 세력을 조장하는데 이 흑암과 고통을 일으키는 현실에 대해서 싸우는 것.

장성을 위한 기도는 항상 해야 함. 하나님께서는 장성의 은혜를 준비하셨으므로 낭비하지 말 것.

2010년 9월 21일 화요일

기도에 대하여 13강 - 무엇을 위하여 기도할 것인가 (2)

자신은 관심도 크게 쏟지 않고 자기의 부분을 충실히 감당해 나가지도 아니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기도할 때는 교회를 크게 생각하는 양으로 교회가 부흥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한다면 그런 기도는 무책임한 기도입니다. 결국 자기를 위해서 하는 기도이든 남을 위해서 하는 기도이든 자기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원한다는 생활의 증명이 그 기도하는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활의 증명이나 자기의 소원과 열정 같은 것들의 뒷받침이 없이 그냥 문득 생각이 나서 말로만 기도하고 만다면 참으로 무책임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기다렸다가 무엇을 주심. 하나님은 이미 다 아시므로 기도 자체가 하나님 앞에 통지해 드린다는 데는 의미가 없는 것이고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가 하나님과 교통한다는 마음의 태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문제를 내가 스스로 풀려고 하거나 세상 사람과 더불어 풀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간다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손발을 쓰셔서 나에게 주시는 것으로 나는 받겠다는 마음. 그것의 소종래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기를 바라는 마음.


내가 타인을 위해서 기도할 때에는 그의 이해휴척에 대해서 그 사람만큼 절실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께 구하는 내용이 그 사람에게 와야만 하겠다는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의미를 인지한 다음에 하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 할 때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필요한 것으로 인정하셔서 주시는 날에는 그가 깨닫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것을 유효하게 쓸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청해서 기도를 하게 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그와 함께 기도하는 일이 하나님 앞에 유효하고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관계가 있는데서 하는 것입니다. 서로 그런 관계가 성립된 사람끼리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타인을 위해 도고 할 때 자신이 질 수 있는 책임을 질 수 있는 용의가 있어야 함. 그의 문제가 해결될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할 준비(최소한 마음의 준비라도)가 있어야 함. 손하나 까딱하지 않고 자신은 아뢰는 것 이상은 할 생각이 없는 것은 잘못임.
"너희 중에 병든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약 5:14~16)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의 의를 입었다는 것을 절실히 마음에 느끼고 생활에 그것을 옮기는 사람이 의인입니다. 구약에서도 항상 생활에서 하나님의 속성과 사랑과 지혜와 능력을 잘 드러내는 사람을 가리켜서 의인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 것을 자각했을 때에 나타나는 의로운 행동 그것은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해서 나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그 공정함을 따라서 나도 공정과 사랑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는 것입니다.
남의 일을 고할 때 내 일을 위해 기도할 때와 마찬가지인 심정으로 움직일 수 있는 데에 이르러야 합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의 위치와 정도가 그와 같은 자리에 올라가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너는 밤낮 너만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네 형제들, 너에게 가까운 친족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리스도의 피로 서로 연락해서 함께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의 경계에 올라가야 한다."


항상 기도해야 할 것들
기본적인 것들을 위하여 먼저 기도해야 함, 그것들은 쉼 없이 늘 해야 하는 기도들임.
복음 사실을 출발점으로 해서 그 복음 사실이 나에게 가르쳐 주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오묘를 더욱더욱 깨달아 가는 것이 기본적인 요구임. (나의 인식의 내용이 정당한 지식으로 증가 되어야 함.

성신님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그 기묘하신 섭리로 악하고 불의하고 언짢은 것에 접촉하는 일이 적도록 하시고, 혹시 그것이 오더라도 능히 소화할 수 있고 능히 극복할 수 있는 은혜 가운데 늘 나를 보존하시고, 성신께서 조명하시고 또한 나의 모든 것을 통재 하셔서 어재ㅈ든지 그러한 그릇된 영향 가운데 탐닉하거나 젖어 들어가는 일이 없기를 늘 바라는 것.
세상의 조류가 점점 더 높게 들어오고 있는데 ,, 항상 무엇을 볼 때 그냥 보아 넘기지 않고 냉철하게 바라보면서 하나님 나라의 사상으로 자기의 크라이테리아를 높여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사상으로 자꾸 더 높이 올라가면 된다는 뜻.

기도에 대하여 12강 - 무엇을 위하여 기도할 것인가(1)

모든 일을 위하여 기도하라.
하나님께서 나의 사정을 모르셔서 내가 하나님 앞에 보고 드리는 것이 아님. 오히려 그것은 내 자신의 인식 상태에 대한 고백이 되고 내가 하나님을 알현하고 구체적으로 고할 때 비로소 나에게 당한 문제를 정당하게 해석하고 바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 자신이 구하는 내용을 바르게 인식하고 있어야 함.
  • 자기를 위하는 기도 : 자신, 가정, 몸담은 교회
  • 언약의 공동체를 위한 기도를 해야 함. 개혁교회가 역사적으로 가진 가장 중요한 신앙 사상 가운데 하나는 언약 사상. 자기가 언약의 한 지체로서 그 언약의 다른 지체에 대해 기도를 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임.

남을 위한 기도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차라리 자기를 위한 기도의 연장으로 함께 싸서 아뢰는 것으로 생각해야 함.
이외에도 우리가 인류 사회의 한 분자로서 자기가 존재하고 있는 사회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자기 주위 환경을 위해서 그리고 자기와 관계되어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도고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남을 위하여 기도한다는 아주 현저한 예입니다.
우리는 각각 소속해 있는 사회에 대해서 하나의 책임자이므로 책임을 느끼고 그 사회가 안전하게 동요 없이 유지되도록 몇 만분의 일이라도 자기 본분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은 사회의 규칙들이 그리스도께서 왕으로서 통치하시는 사실임을 믿는 까닭에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의 대권이 원하시는 대로 기뻐하시는 대로 거기 영광스럽게 작용하기를 바랍니다" 하는 기도를 늘 하는 것입니다. 남을 위한 기도는 "그 사람이 잘되게 합소서" 하는 행복론적인 위치에서 하는 기도를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통치의 역사가 구체적으로 거기서 늘 나타나사 결국 이 모든 것이 합해서 왕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직접적으로 경영하시고 이끄시고 사랑하시는 바 은혜의 왕국의 발전에 이바지하게 하시고, 여기에서 은혜의 왕국이 튼튼하게 능력 있게 그 자태를 드러내게 합소서." 하고 늘 기도하고 사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는 것임. 인간이 마귀에 속했으면 하나님이 어쨌든지 미워만 한다는 이원론적인 생각은 부당함.(사탄에 매인 사람일지라도 그가 사람인 이상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께서 일반 은혜를 주시는 대상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일반 은총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유의 통치자이시고 사탄이나 모든 귀신들이 두려워 복종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믿는 것임.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항상 이기적이고 소극적인 데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정당한 위치에서 이러한 모든 것을 포회하고 기도해 나가는 것입니다.


기도에 따르는 책임
항상 하나님 앞에 드린 기도에 대해서 항상 거룩한 도리에 합당한지 그 여부를 판단해 나가야 합니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문을 두드리는 데까지 이르러야 할 필요가 있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는 말씀이 있어서 어디로 가야 할 것까지도 가르치셨음.
부흥됐다는 것은 신앙이 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달아서 그 시대에 내려진 자기네 사명을 알고 모든 흑암의 조류에 대해 역행해 가면서 신령한 증거를 해 나가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바른 기도를 드리는데 필요한 것들
기도하는 내용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도리에 부합하는지의 여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1. 진실을 파악해야 함. (대상이 교회 라면 교회 전체에 대한 진실, 사건이라면 사건에 대한 진실,,)
  2. 자기가 기도하는 말이 포함하고 있는 내용에 한해서 그 진실을 자세하게 파악해 나가야 합니다.
  3.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라든지 가르침은 무엇인가를 주의해서 생각해 나가야 함.
목표가 있고 구체적인,,,,
"교회가 부흥하게 합소서" => "교회의 무엇이 어떻게 생겼으니 어떻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책임 있는 태도를 가지려면 미리 연구한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에 대하여 11강 -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중요한 점은 사람은 하나님의 어떠한 법칙과 명령하에서 살고 있느냐 하는 것으 바로 알고 기도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끊임없는 교통을 하는 것이므로 그 때 임시로 생활에서 당하는 문제를 주님 앞에 아뢰는 식으로 하는 것보다는 인생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가르침, 인류의 역사와 또 좁게는 나 개인의 일생의 행보에 대한 하나님의 크신 계획과 경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 이런 것들을 알고 기도를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종교 개혁자 들이 가장 강조한 세가지>
  1.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최고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2. 사람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3. 모든 사람은 다 제사장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기도가 모든 것의 기본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야 말로 교회의 존립이나 성격의 구성이나 잘잘못을 판단하는 일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표준으로서 유일의 권위라는 사실이다.
말씀의 본의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부터 성신님께서 조명하심으로써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 이라는 것은 어떤 구절을 "아, 이렇구나" 하고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성경이 우리에게 먼저 알기를 요구하시는 것을 알고 그 다음에 알아야 할 것을 차서 있게 바로 알아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안는다는 상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실 그 거룩한 계시 내용을읽고 공부하면서 합리적이고 이지적인 연구와 수용의 태도를 가지지 아니할 때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않는 상태는 성경을 안 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또한 성경을 해석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담박하게 진정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벌써 어떠한 종교적인 목표와 종교적인 자기의 주장이 명확하게 있어서 성경에서는 다만 방법만을 구하려 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성경이야 말로 우리에게 무엇을 위하여 살 것인가를 가르치는 책인데 무엇을 위하여 살 것인지는 내가 만들어 놓고 성경을 이용한다 말입니다.
성경의 거룩한 도리가 먼저 하나님은 누구이신가를 알려주고 나는 누구인가를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마음 가운데 자기의 의사를 만들어 가지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선입관이나 견강부회의 강작이 없어야 합니다. 언제든지 마음에 걸림이 없이 말씀이 나에게 "이렇다" 하면 그렇게 알아야 하는 것이지 "말씀은 그렇다고 하지만 이것이 아니냐" 하는 태도가 없어야 합니다.

2010년 8월 17일 화요일

기도에 대하여 10강 - 신령한 기도의 전제 조건

신령한 자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늘 듣는 기도입니다

기도의 목적은 기도하는 내용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 은혜 내려주심을 받는 것에 있음.

(기도의 가장 강한 성격은 하나님과 나의 거룩한 교통)

지혜가 구할 때의 전제 조건
지혜가 부족하다는 그 사실에 대해서 먼저 자기가 인정을 해야 합니다. (인간의 당연한 지혜의 부족을 말하는 것이 아님, 특별히 어떤 지혜가 부족하거든)
지혜가 부족하다는 말은 당연히 어떠한 일정한 양의 지혜가 있어야 할 터인데 그것이 모자란다는 말입니다. 전연 아무것도 없다기보다는 모자라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거룩한 사상은 "네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네 십자가, 네가 마땅히 그리스도 앞에서 져야 할 것을 지고 그리스도를 좇아라" (마 16:24)
하나님께서는 주권자로서 우리를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사용하시는 것임.
(중요한 것은 절대로 자신의 꾀를 연장시켜달라는 취지로 지혜를 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하나님을 단순히 나의 길을 터주는 분으로 생각해는 안될 것임.)
"네가 하나님 당신의 목적을 위해서 쓰시려는 그릇으로, 하나님의 종으로 세워 주셨으니 그 위치에서 자기 인생 행보를 해 나가다가 갈 바를 알질 못하고 어떻게 할까 할 때 하나님께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다" 오직 그것 뿐입니다.

지혜가 부족하다는 말은 무엇이냐 하며 지금까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알고 인도를 받아 나가다가,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지지를 받아서 가는 길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를 때 하나님께 구하라는 얘기 입니다. 내 자신의 영혼의 기능 가운데 인식 작용이 막히는 순간이 올 수 있습니다. 완전히 모든 작용이 끝난다는 말이 아니라 자기가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한 자기의 인식이 희박해지는 때

왜 구하라고 하시느냐 하면 그렇게 구하는 데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생각해서 이런 것을 준비했다가 네가 원하는 때 준다" 하심으로써 인격적으로 장성케 하시는 것입니다. 상대가 기계라면 자동차에 기름 넣듯이 그 기계에 필요한 것을 다 넣어 가지고 그냥 끌고 가겠지만 그가 인격체인 까닭에 그의 영혼의 기능이 작용해서 스스로 하나님 앞에 구해서 자기가 받아 가지고 깨달아 알고 그 다음의 행보를 하라는 것입니다.

2010년 7월 29일 목요일

기도에 대하여 9강 - 기도와 믿음

"저의 짧은 생각과 인생의 제한으로 이른 데가 여기이오니 하나님이 정하신 바가 있으시면 그 일을 이루어 주십시오" 하는 것이 정당한 것이지, 자기의 생각을 절대화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생각을 꼭 들어주셔야만 하겠다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외람된 생각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꼭 주신다고 믿지 못하는 것을 죄송하게 생각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기도는 그런 데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바로 들어주시지 아니하는 때에는 이 기도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에 가까운 것인가를 다시 판단해야 합니다. 그러나 공허한 두뇌와 심정을 가지고는 제대로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언제든지 기도할 때에는 자기 기도를 반성하고, 반성하면서 또 기도하고 생각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대답하실 때 그 대답을 충분히 들을 만한 위치, 대답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자리에 올라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중요히 다시 배워야 할 것은 어떤 기도에 대해서는 확신을 하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들. (이 약속들은 자녀에게 주신 것임) 약속해주신 것들이므로 구하면 주심.
    "너희 중에 누가 지혜가 부족하거든 우리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러면 주시리라" (약 1:5)
    "네 짐을 여호와께 말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55:22)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잠 3:1~2)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잠 3:3~4)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 3:5~6)
    ....

그냥 덮어놓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덮어 놓고 주면 그에게는 그것이 그냥 은혜이지 권리가 안됩니다.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것은 명문으로 약속하셨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상고하고 깨달은 사람은 그만큼 더 풍성하게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의 세계 가운데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약속을 믿고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냐 하면, 그 약속의 전제 조건으로 내놓은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잠 3:3~4)
풍성한 진리가 항상 그에게 있고 인자가 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높이신다는 말입니다. 만사에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어떻게 하실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원하시겠는가" 하고 매번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자기와 관련된 현실에서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살핌으로써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법칙에 깊이 관련된 일에 대해서 기도를 할 때는 대부분 일반법칙이라는 것을 의지하게 됩니다. 일반법칙에 대해서 사람들은 보통 두가지 태도를 취합니다. 첫번째는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인과관계 안에서, 과학적인 면 안에서 생각을 하여 단념을 하는 경우입니다. 두번째는 "하나님은 능치 못하실 일이 없으시니까 위대한 능력을 발휘하사 과거에는 한번도 이런 일이 안 일어났지만 이번 한번은 예외적으로라도 여기 큰 능력을 나타내 주시옵소서" 하고 일이 파탄이 날 때까지는 기도를 쉬지 않고 끊임없이 해 나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 신령한 자. 하나님 앞에 충실히 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기도의 동기가 어디 있는가를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기도의 동기 즉 자기 마음 가운데 이번에는 내게 예외가 와야만 하겠다고 간절히 구하는 것이 인간적인 행복 추구나 이기적 동기에서 나온 것인가 아닌가를 반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단념을 한다고 할 때도 그게 어떤 동기에서 나오는 것인가. 항상 자기의 동기와 자기의 심상을 주의해서 봐야 합니다.
(일반법칙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하나님께서 관장하시는 하나님의 법칙이다)
바울 선생이 자기를 찌르는 가시 문제에 대해서 기도하고 난 후에 그 환희에 가득찬 보고를 보면 모든 관심이 자기의 행/불행에 있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 그 크신 경영과 영광의 내용이 이 땅 위에서 어떻게 전진하느냐에 집중해 있었던 것입니다. 가능성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문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무엇이 이제 필요하겠느냐" 그것입니다.
사람은 보통 어떤 현실상 큰 문제에 임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뒤로 가고 항상 그 문제가 해결되어 거기서 빠져 나와야 하겠다는 생각이 자기를 압도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자는 생활 가운데 닥치는 어떤 사실에서든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전제로 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방도로서 이것이 그렇게 되어야 겠다는 것을 깨닫고 항상 거기에 의지해서 호소해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나라와 영광을 땅 위에서, 역사 위에서 진전시키는 그 일을 위해서 이렇게 하셔야만 하겠다고 믿는 까닭에 그것을 구하고 또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항상 어떠한 일정한 인생의 목적과 필요들이 먼저 오고, 그것들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정당한 위치에 있을 때 비로소 믿음이 우리 안에서 제대로 작용하느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런 전체의 경영을 늘 간절히 사모하고 그것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데에 터를 두고 있을 때에 비로소 깊은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우리가 믿음을 어떻게 얻느냐 할 때 그리스도의 말씀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알기를 원하시는 그 거룩한 내용. 하나님 나라의 여러 가지 진리의 내용을 주의해서 배워야 믿음이 생기는 것이지, 기도를 방편으로 "주님, 믿습니다. 주님, 믿습니다" 한다고 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으면 이루어 주신다고 했으니까" 하고 그 말만 들고 다니면서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고 백 번 외운다고 해서 그냥 그렇게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할 때 믿음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항상 기도의 목적이라든지 동기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 나라의 능력이 땅 위에서 증시되어 나가는데 내가 그 그릇으로 쓰이기 위해서 이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떤 위치에서 살기를 바라시는데, 그 위치라는 것은 나 자신이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 행복스러운 위치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불행한 위치에 서야만 영광을 받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든지 인격적으로든지 도덕적으로든지 물질적으로든지 행복스러운 위치에 세워 놓으시고서 영광을 나타내시려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해 주시는 것은 우리가 건실하게 마음에 평안을 가지고 가장 힘써 일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성경의 약속에 "너희가 밤낮 배를 곯아야만 내가 영광을 받겠다"고 한 데가 없습니다. (물질의 문제에 있어서 빈곤에서 밤낮 두류 방랑하며 고통받아야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는 생각은 동양의 금욕주의적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나왔습니다.)
하지만 일단 박해가 있다든지 특별한 큰 증거를 해야 할 때에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라도 나서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때는 아무것도 돌아볼 것 없이 나서야 합니다. 히브리서에서 믿음의 선구자들이 얼마나 산과 들로 두류 방랑하고 옷 입는 것도 제대로 다 입지 못한 사람들이었던가를 가르치면서 그들을 일컬어 세상이 용납할 수 없는 위대한 인물들이라고 했습니다. (모두가 이런 상황에 처하는 것이 아님. 특수한 상황이며 하나님께서 특별히 쓰시는 사람들임)

  • 기도하는 목적이라든지 내용에 대해서 기본 심상이 발라야한다.
  •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늘 들어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 믿고 기도해야 한다.

2010년 6월 11일 금요일

사람 찾기

이요셉, 이모세, 이루트, 이요한, 이여영, 이누가 (이루가?)

중학교때 이민간 이층집 친구들,
연락이 끊긴지 십여년이 된것 같은데,
믿음의 가정이였는데, 어찌어찌하다보니까 연락이 다 끊겼다.

아마 내가 기계에 관심이 많고 이공계열 쪽으로 오게 된 것. 모두 이층집 애들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죽기전에 한번 볼수 있겠지....